
직원이랑 그런 얘기를 했다. 앞으로 회사가 사람을 뽑을 때 연봉과 근무시간만 제시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지금까지 좋은 일자리의 조건은 비교적 익숙했다. 연봉, 직급, 스톡옵션, 복지, 근무시간, 재택 가능 여부. 회사가 한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는 대체로 돈과 시간의 언어로 설명됐다.
그런데 AI가 지식노동의 중심으로 들어오면, 조건이 하나 더 붙는다.
그 사람은 어떤 모델을 쓸 수 있는가. 하루에 얼마나 많은 에이전트를 돌릴 수 있는가. 회사 내부 데이터와 도구에는 어디까지 접근할 수 있는가.
이 변화는 결국 AI 이후에 버려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다시 묻게 만든다. 도구를 잘 쓰는 문제라기보다, 일의 조건 자체가 바뀌는 문제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것은 복지가 아니다. 생산성의 상한에 관한 문제다.
이미 숫자가 나와 있다
2026년 3월, 젠슨 황은 GTC 키노트에서 엔지니어에게 연간 토큰 예산이 필요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핵심은 연봉과 별도로 상당한 규모의 토큰을 붙여 사람의 생산성을 증폭시키겠다는 관점이었다.
그는 또 채용 시장에서 “이 일에 토큰이 얼마나 딸려 오느냐”가 이미 리크루팅 도구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복지 포인트나 교육비 지원 수준의 말이 아니다. 채용 조건의 문법이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

일주일 뒤 Microsoft의 Charles Lamanna 부사장은 시애틀 행사에서 실제 사례를 공개했다. 한 지원자가 일정 수준 이상의 일일 토큰 예산을 팀에 보장해주면 입사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요구 규모는 하루 100달러에서 수백 달러 수준으로 소개됐다.
흥미로운 디테일은 이 지원자가 요구한 것이 개인 몫이 아니라 팀 단위 토큰 예산이었다는 점이다. 토큰이 개인 보상을 넘어 조직 설계의 변수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채용 시장의 가장 앞단에서는 이미 명시적이다. Anthropic의 연구 펠로십은 주급과 별도로 월 약 1만 5천 달러 규모의 compute 예산을 제공한다. 급여 따로, 계산 자원 따로. 계약서에 두 줄이 나란히 적히기 시작한 셈이다.
지휘자와 악단
오케스트라를 생각해 보면 구조가 보인다. 지휘자는 직접 악기를 연주하지 않는다. 곡을 해석하고, 파트를 배분하고, 전체 소리를 책임진다. 연주는 악단이 한다.
AI 에이전트를 쓰는 지식노동자가 정확히 이 위치로 이동하고 있다. 리서치를 돌리고, 코드 검토를 맡기고, 보고서 초안을 여러 방향으로 병렬 생성하게 하고, 사람은 해석과 최종 판단을 맡는다. 업계에서 이 일을 부르는 이름이 이미 있다. 오케스트레이션. 은유가 아니라 직무 기술서에 들어가기 시작한 단어다.

과거의 지식노동자는 연주자였다. 하루 8시간, 한 사람의 집중력과 체력이 산출의 상한이었다. 지휘자가 된 노동자에게 상한을 정하는 것은 자기 시간이 아니라 맡은 악단이다.
그리고 토큰과 컴퓨트가 바로 그 악단의 규모와 수준을 결정한다. 예산이 4인 앙상블을 허용하는지, 100인 오케스트라를 허용하는지. 단원이 어떤 수준의 연주자인지, 곧 어떤 모델에 접근할 수 있는지. 같은 지휘자라도 맡은 악단이 다르면 낼 수 있는 소리의 상한이 다르다.
| 과거의 조건 | 앞으로 붙을 조건 | 의미 |
|---|---|---|
| 연봉 | 연간 AI budget | 돈으로 사는 생활 수준과 계산 자원으로 여는 산출 상한이 함께 협상된다. |
| 근무시간 | 동시 에이전트 실행량 | 한 사람이 직접 쓰는 시간보다 병렬로 맡길 수 있는 작업 수가 중요해진다. |
| 직급·권한 | 데이터·도구 접근권 | 누가 어떤 내부 지식과 시스템을 AI에 연결할 수 있는지가 성과 차이를 만든다. |
| 복지 | 모델 등급과 보안 환경 | 최고급 모델을 안전하게 쓸 수 있는 환경은 복지가 아니라 생산 인프라가 된다. |
노동 계약이 “얼마를 줄 것인가”에서 “어떤 악단을 맡길 것인가”로 넓어진다는 뜻이다.
가장 강한 반론: 토큰은 곧 공짜가 되지 않나
여기서 정직하게 반론 하나를 다뤄야 한다. 토큰 가격은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 Gartner는 2030년까지 1조 파라미터급 모델의 추론 비용이 2025년 대비 약 90% 하락할 것으로 전망한다.
그렇다면 토큰은 전기나 인터넷처럼 당연한 인프라가 되고, 협상 테이블에 올릴 것도 없어지는 게 아닌가.

그런데 같은 Gartner 보고서가 정반대의 경고를 붙였다. 단가가 떨어져도 기업의 AI 비용은 오히려 오를 수 있다고. 에이전트형 작업이 태스크당 소비하는 토큰이 일반 대화보다 훨씬 많고, 소비 증가 속도가 단가 하락 속도를 앞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Goldman Sachs는 에이전트 확산으로 2030년까지 토큰 소비가 24배 늘 수 있다고 전망했다.
즉 단가는 커모디티가 되어도, 한 사람에게 배정되는 총량은 희소 자원으로 남는다. 전기 요금이 싸졌다고 데이터센터 전력 예산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협상의 단위가 “토큰 몇 개”가 아니라 “연간 얼마짜리 계산 자원”이 될 뿐이다.
토큰맥싱의 함정
다만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토큰 사용량은 생산성이 아니다. 투입량이다.
이미 부작용이 보도되고 있다. Uber는 2026년 AI 예산을 4개월 만에 소진했고, Meta에서는 직원이 누가 AI를 가장 많이 쓰는지 추적하는 ‘Claudeonomics’ 리더보드를 만들었으며, Amazon은 직원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토큰을 쓰라고 독려하고 있다. 사용량 자체가 성과 지표처럼 취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 잘못 보기 쉬운 지표 | 더 중요한 질문 |
|---|---|
| 토큰을 얼마나 많이 썼는가 | 그 토큰이 어떤 의사결정, 코드, 보고서, 고객 접점으로 바뀌었는가 |
| AI 사용 시간이 얼마나 긴가 | 사람의 판단 시간이 더 나은 곳으로 이동했는가 |
| 프롬프트 수가 얼마나 많은가 | 반복 가능한 워크플로와 검수 기준이 생겼는가 |
| 비용을 얼마나 태웠는가 | 같은 비용으로 다음 산출의 품질과 속도가 개선됐는가 |
많이 태우는 것은 능력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토큰을 결과물로 바꾸는 전환율이다. 같은 악단을 맡겨도 지휘자에 따라 전혀 다른 소리가 난다. 토큰 예산이 커질수록, 그 예산을 산출물로 연결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격차는 오히려 벌어진다.
토큰을 많이 쓰는 것보다 중요한 건, 질문보다 맥락과 판단이 중요해지는 이유를 이해하는 일에 가깝다. 결국 계산 자원은 판단을 대신하지 않고, 판단이 닿는 범위를 넓힌다.
한국은 어디쯤 와 있나
한국 대기업들은 2026년 들어 ‘접근권을 지급하는’ 단계에 본격적으로 진입했다.
삼성은 2023년 5월 사내 정보 유출 사고 이후 외부 생성형 AI를 전면 차단했다가, 3년 만인 올해 6월 전 관계사 업무에 ChatGPT, Gemini, Claude를 공식 도입했다. 도입 전 임직원 2,500명 대상 검증을 거쳤고, 사장단 50여 명이 그룹 역사상 처음으로 AI 부트캠프에 들어갔으며 임원 2,300여 명이 집중 교육을 받는다.
LG는 LG CNS가 Anthropic과 그룹 전 계열사에 적용 가능한 Claude 엔터프라이즈 통합 계약을 맺었다. 현대차그룹은 현대오토에버가 개발한 사내 생성형 AI ‘H Chat’을 운영 중이고, GS는 자체 플랫폼 ‘미소(MISO)’로 임직원들이 1년간 1만 개의 업무 툴을 직접 만들어냈다.

그런데 여기서 미국과의 시차가 보인다. 실리콘밸리의 논의는 이미 “개인이 토큰을 협상하는” 단계로 넘어갔는데, 한국은 “회사가 접근권을 일괄 지급하는” 단계다. 전원에게 같은 계정, 같은 한도. 아직 어떤 채용공고에도 토큰 예산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시차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접근권이 균등하게 지급되는 순간부터 사용의 격차가 데이터로 쌓이기 때문이다. 누가 같은 도구로 몇 배의 산출을 내는지 회사가 알게 되면, 그 사람에게 더 많은 자원을 배정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균등 지급은 차등 배정의 전 단계다.
무엇이 계약서에 적히게 되는가
3년 안에 모든 직장인이 토큰을 연봉처럼 협상하게 된다고 말하면 과장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산출량이 매출이나 제품 속도에 바로 연결되는 직군부터는 충분히 가능하다. 개발자만이 아니다. 리서처, 디자이너, 기획자, 컨설턴트, 마케터. 산출물이 정보와 판단으로 만들어지는 직군이라면 모두 해당된다.
그때 노동 조건은 이렇게 바뀐다.
이름은 토큰이 아닐 수도 있다. compute credit, AI budget, agent seat로 불릴 수도 있다. 명칭은 중요하지 않다. 한 사람에게 배정되는 계산 자원의 규모가 노동 조건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결국 사람의 가치는 줄어드는 게 아니라 더 선명해진다. AI가 많은 일을 대신할수록 사람에게 남는 것은 무엇을 맡길지 정하는 판단, 결과를 검수하는 책임, 그 산출물을 실제 세계에 연결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연봉과 토큰이 나란히 서는 시대가 온다면, 질문은 “얼마나 많이 쓸 수 있는가”가 아니다.
이 사람에게는 얼마나 큰 악단을 맡겨도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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