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책상 위에 노트북과 출력물, 커피잔이 놓여 있다.
만들어놓고 내보내지 못한 것들은 폴더 안에서 안전하다. 문제는 안전한 채로 오래된다는 것.

2026년 7월 5일, 예전에 만들어둔 파일 하나를 다시 열었다.

제목은 대충 “AI 시대에 버려야 할 것들” 쪽이었다. 정확한 제목은 몇 번 바뀌었고, 폴더 안에는 비슷한 파일이 여러 개 있었다. 처음 만든 목록, 다시 정리한 목록, 점수까지 붙인 목록, 그다음 편으로 이어가려고 만든 목록.

다 만들어놓고 한동안 발행을 안 했다.

웃긴 건 그 목록 안에 이미 답이 있었다는 점이다. “콘텐츠는 완성해서 발행해야 한다”는 믿음을 버려야 한다고 적어놓고, 정작 그 글은 계속 붙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더 다듬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표를 손보고, 순서를 바꾸고, 설명을 붙이고, 나중에는 아예 두 번째 목록까지 만들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게 이렇게까지 번질 줄은.

7월부터 이 블로그에 매일 뭐라도 올리기로 하면서, 예전에 만들어놓고 내보내지 못한 것들을 하나씩 다시 열어보고 있다. 폴더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있었다. 제목만 있는 글, 절반쯤 쓴 글, 표만 있고 본문이 없는 글, 너무 그럴듯해서 오히려 손대기 싫어진 글.

오늘은 그중 하나다.

버릴 것 50개를 적다가, 결국 내 얘기까지 나온 글.

50개 믿음처음에는 버려야 할 믿음과 습관을 그냥 길게 적었다.
두 개의 축긴급도에 관성 강도를 더하니 체감과 숫자가 맞기 시작했다.
14개 Deep Debt긴급도 90 이상, 관성 80 이상인 항목만 먼저 남겼다.

처음엔 그냥 50개를 나열했다

시작은 단순했다.

AI 얘기를 하다 보면 다들 뭘 배워야 하는지는 많이 말한다. 프롬프트를 배워야 한다, 자동화를 배워야 한다, 코딩을 배워야 한다, 데이터 감각을 길러야 한다. 그런 말은 이미 충분히 많았다.

그런데 뭘 버려야 하는지는 상대적으로 덜 말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이 생각은 질문 앞뒤의 맥락과 판단이 더 중요하다는 쪽으로 이어졌다. 새로 배우는 기술보다, 무엇을 맡기고 무엇을 통과시킬지 가르는 감각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게 조금 이상했다. 새로운 게 안 들어오는 이유가 꼭 배우는 능력이 부족해서만은 아니니까. 이미 머릿속에 오래된 규칙이 너무 많이 앉아 있으면, 새로 들어온 것도 결국 예전 방식으로만 쓰게 된다.

그래서 Claude랑 같이 목록을 만들었다. 버려야 할 믿음, 습관, 전제 같은 것들.

“정보는 직접 찾아야 한다.”

“초안은 내가 직접 써야 실력이다.”

“암기가 지식의 기반이다.”

이런 문장들이 나왔다. 세다 보니 50개가 됐다.

거기서 멈추면 됐는데, 나는 점수까지 붙였다. 지금 버리지 않으면 손실이 얼마나 빨리 커지는지 보려고 했다. 이름은 긴급도라고 붙였다. 98점, 97점, 96점. 숫자를 붙이고 나니 뭔가 정리된 것처럼 보였다.

만들고 나서는 꽤 뿌듯했다.

이 정도면 바로 올려도 되겠다 싶었다.

물론 안 올렸다.

발행하지 않고 두 번째 목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다음에는 세 번째, 네 번째까지 갔다. 시리즈가 생겼는데, 정작 세상에 나간 건 하나도 없었다. 목록은 늘어났고, 글은 계속 안전했다.

안전한 채로 오래됐다.

그런데 점수 하나로는 안 맞았다

며칠 전, 네 번째 목록까지 만들어놓고 첫 번째 파일을 다시 열었다. 이제는 진짜 다듬어서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보니 이상한 데가 있었다.

“알림을 다 꺼야 집중된다”는 70점이고, “초안은 내가 직접 써야 실력이다”는 97점이었다. 긴급도만 보면 둘 다 버려야 할 믿음이긴 했다.

그런데 체감은 전혀 달랐다.

알림 얘기는 비교적 쉽다. 한 번 AI 필터링을 써보거나, 알림을 묶어서 받아보면 금방 감이 온다. 아, 꼭 다 꺼야 하는 건 아니구나. 이렇게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초안 얘기는 잘 안 된다.

머리로는 안다. 이제는 초안을 전부 내가 직접 쓸 필요가 없다는 걸 안다. AI가 빠르게 초안을 만들고, 나는 방향과 판단과 편집에 더 많은 시간을 써도 된다는 것도 안다.

AI가 일의 일부가 되면, 개인의 습관을 넘어 토큰 예산이 노동 계약의 일부가 되는 문제까지 이어진다. 버려야 할 것은 글쓰기 방식만이 아니라 일의 조건을 보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글을 쓰려고 하면 손이 멈춘다.

내가 쓰지 않은 초안은 내 글이 아닌 것 같고, 내가 처음부터 문장을 만들지 않으면 실력이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남아 있다. 이게 말로는 웃긴데, 실제로는 꽤 질기다.

급한 정도와 안 버려지는 정도는 다른 문제였다.

그래서 축을 하나 더 넣었다. 이름은 관성 강도라고 붙였다. 조금 딱딱하긴 한데, 달리 부를 말이 잘 안 떠올랐다. 이 믿음이 내 정체성이나 예전 성공 경험에 얼마나 달라붙어 있는지 보는 축이다.

50개를 전부 다시 매겼다.

낮은 긴급도 / 높은 관성정체성에는 붙어 있지만 지금 당장 손실이 커지지는 않는 믿음.
높은 긴급도 / 높은 관성이번 글의 Deep Debt. 가장 먼저 손댈 곳.
낮은 긴급도 / 낮은 관성상황이 오면 자연스럽게 바꿔도 되는 습관.
높은 긴급도 / 낮은 관성작게 실험하면 빨리 바꿀 수 있는 실행 항목.

관성 ↑긴급도 →

유리벽에 손으로 그린 사분면과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두 축을 긋고 보니 포스트잇이 우상단에 몰렸다. 급한 것과 안 버려지는 것은 자주 같은 자리에 있었다.

우상단에 14개가 남았다

두 축을 교차시키니까 한쪽 구석에 뭉치는 것들이 보였다.

긴급도 90 이상, 관성 80 이상.

지금 버리지 않으면 손실이 빨리 커지는데, 막상 잘 안 버려지는 것들. 세어보니 14개였다.

부채라는 단어가 먼저 떠올랐다. 그냥 부채도 아니고 깊이 박힌 부채. 그래서 파일에는 Deep Debt라고 적어뒀다. 조금 유난한 이름이긴 한데, 그때는 그 말이 제일 잘 맞았다.

14개는 이랬다. 각 항목 아래 막대는 긴급도와 관성이다.

  1. 초안은 내가 직접 써야 실력이다긴급도97관성85
  2. 암기가 지식의 기반이다긴급도96관성90
  3. 전문성은 10년을 쌓아야 생긴다긴급도95관성88
  4. 정답 있는 문제를 잘 풀어야 우수하다긴급도95관성86
  5. 오래 일하면 성과가 난다긴급도94관성87
  6. 한 우물만 깊게 파야 살아남는다긴급도94관성82
  7. 콘텐츠는 완성해서 발행해야 한다긴급도93관성89
  8. 학위·자격증이 역량을 증명한다긴급도93관성81
  9. AI 생성물은 진짜 작품이 아니다긴급도92관성91
  10. 직원 수가 조직의 역량이다긴급도92관성80
  11. 관리자는 보고받아 판단하는 사람이다긴급도91관성83
  12. 리더는 답을 아는 사람이다긴급도91관성82
  13. 창의성은 인간 고유의 영역이다긴급도90관성92
  14. 좋은 대학이 좋은 삶을 보장한다긴급도90관성86

읽다 보면 알겠지만, 하나같이 어디선가 옳다고 배워온 것들이다. 부모에게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시장에서, 혹은 예전의 나에게서.

그래서 깊다.

몇 개만 봐도 그렇다. “초안은 내가 직접 써야 실력이다”라는 믿음은 꽤 오래 나를 버티게 했다. 직접 쓰고, 고치고, 다시 쓰면서 글을 배웠다. 그 경험이 있으니 쉽게 놓기 어렵다.

문제는 지금도 초안에 세 시간을 쓰면, 편집과 판단에 쓸 세 시간도 같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암기가 지식의 기반이다”도 비슷하다. 예전에는 많이 외우는 사람이 빨랐다. 시험도, 보고서도, 회의도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필요한 정보를 꺼내는 방식 자체가 달라졌다. 외우는 일이 전부 쓸모없어진 건 아니지만, 예전만큼 중심에 둘 일은 아니다.

9번도 걸렸다.

“AI 생성물은 진짜 작품이 아니다.”

이건 관성이 특히 세다. 만든 방식의 순수성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이해된다. 나도 아직 그 마음이 있다. 그런데 그 마음을 붙잡는 동안 속도와 단가와 시도 횟수를 같이 잃는 경우가 생긴다.

그리고 7번.

콘텐츠는 완성해서 발행해야 한다.

이건 그냥 내 항목이었다.

매기다 보니 패턴이 하나 보였다

50개를 두 축에 올려놓고 나니, 이상하게도 급한 것일수록 관성도 센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우연인가 싶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당연했다. 초안을 직접 쓰면서 실력을 쌓았고, 오래 버티면서 전문성을 만들었고, 외워서 시험을 통과했고, 정답을 맞히면서 칭찬을 받았다.

그 방식으로 한 번이라도 잘돼본 사람은 그 방식을 쉽게 못 버린다.

몰라서 못 버리는 게 아니다.

그걸로 잘돼봤기 때문에 못 버린다.

언러닝을 막는 건 무지가 아니라 과거의 성공 경험일 때가 많다.

이번 작업에서 건진 문장이 있다면 이거였다. 언러닝을 막는 건 무지가 아니라 과거의 성공 경험일 때가 많다.

조금 멋있게 들리는 문장이라 쓰면서도 망설여졌는데, 그래도 이 말은 남겨둬야겠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이사를 마친 뒤 비어 있는 아파트 거실에 박스 몇 개가 기대어 있다.
이삿날 빈 거실이 넓어 보이는 건 원래 넓어서가 아니다. 그동안 뭘 얼마나 쌓아뒀는지는 비워봐야 안다.

언러닝이 어려운 이유도 여기 있는 것 같다. 지식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 문제에 가깝다. 리스트를 아는 것과 실제로 버리는 것 사이가 멀다.

나만 해도 그렇다.

목록을 만들 줄은 알았는데, 발행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이 글부터 내보낸다

50개를 한꺼번에 해결할 생각은 없다. 그렇게 하면 또 아무것도 못 할 가능성이 높다. 이 패턴은 이제 좀 안다.

계획은 단순하게 잡았다.

Deep Debt에서 하나 고르고, 24시간 안에 첫 행동을 한다. 그리고 일주일에 하나씩 다음 항목으로 넘어간다. 50주면 한 바퀴다.

될지는 모르겠다. 중간에 흐지부지될 수도 있고, 몇 개는 이름을 바꿔야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첫 번째 항목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7번. 콘텐츠는 완성해서 발행해야 한다.

그래서 이 글은 90점쯤에서 멈추고 오늘 나간다. 예전의 나라면 표를 더 다듬고, 각 항목에 설명을 붙이고, 이미지까지 다시 고르느라 며칠 더 붙잡고 있었을 거다. 그러다 또 새 폴더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그만한다.

나머지 36개도 따로 꺼내볼 생각이다. 뒤에 만든 세 편의 목록도 그냥 버리기엔 아깝다. 특히 두 번째로 만든 “앞으로는 이렇게 해야 한다” 50개는 이 목록이랑 짝이라서, 다음 글에서 이어 쓰는 게 맞겠다.

읽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만 물어보고 싶다. 아래 50개 중에 제일 뜨끔한 게 뭐였는지. 대체로 그 불편함이 자기 Deep Debt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신호에 가깝다.

나는 7번이었다.

그래서 지금 발행 버튼을 누른다.

새벽 지하철 승강장에서 한 사람이 막 열린 열차 문으로 들어가고 있다.
첫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타는 쪽이 움직여야 한다.

부록 — 전체 50개 목록

다시 꺼내볼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전체를 붙여둔다. 각 항목 아래 막대는 긴급도와 관성이다. 굵게 표시한 항목이 이번에 Deep Debt로 묶인 14개다.

  1. 정보는 직접 찾아야 한다긴급도98관성72
  2. 초안은 내가 직접 써야 실력이다긴급도97관성85
  3. 코딩은 개발자의 영역이다긴급도96관성78
  4. 전문성은 10년을 쌓아야 생긴다긴급도95관성88
  5. 한 우물만 깊게 파야 살아남는다긴급도94관성82
  6. 회의는 모여서 결론을 내는 자리다긴급도93관성75
  7. 직원 수가 조직의 역량이다긴급도92관성80
  8. 암기가 지식의 기반이다긴급도96관성90
  9. 정답 있는 문제를 잘 풀어야 우수하다긴급도95관성86
  10. 규모가 경쟁 우위다긴급도91관성77
  11. 고객 응대는 사람이 해야 신뢰받는다긴급도88관성68
  12. 창의성은 인간 고유의 영역이다긴급도90관성92
  13. 콘텐츠는 완성해서 발행해야 한다긴급도93관성89
  14. 도구를 잘 다뤄야 데이터를 다룬다긴급도87관성70
  15. 이직은 연봉을 올리는 수단이다긴급도82관성74
  16. 관리자는 보고받아 판단하는 사람이다긴급도91관성83
  17. 결재 단계가 많을수록 신중한 조직이다긴급도86관성79
  18. 학위·자격증이 역량을 증명한다긴급도93관성81
  19. 긴 글이 성의 있는 소통이다긴급도84관성66
  20. 설득은 논리 싸움이다긴급도80관성71
  21. 오래 일하면 성과가 난다긴급도94관성87
  22. 가격은 원가에 마진을 붙여 정한다긴급도78관성76
  23. AI 생성물은 진짜 작품이 아니다긴급도92관성91
  24. 전략은 위에서 짜고 아래서 실행한다긴급도88관성84
  25. 생각할 시간은 사치다긴급도75관성69
  26. 공부는 커리큘럼 순서대로 해야 한다긴급도85관성73
  27. B2B는 관계와 접대로 뚫는다긴급도79관성75
  28. 기획서는 두꺼울수록 설득력 있다긴급도86관성72
  29. 안정적인 대기업이 최선의 직장이다긴급도81관성80
  30. 실수는 피해야 할 것이다긴급도83관성78
  31. 마케팅은 광고 예산 싸움이다긴급도84관성70
  32. 피드백은 신중하게, 나중에 준다긴급도77관성67
  33. 시장 분석은 분기마다 하면 된다긴급도85관성68
  34. 교육은 HRD 부서가 시켜주는 것이다긴급도87관성76
  35. 나이 들면 새 기술을 못 배운다긴급도88관성85
  36.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해야 한다긴급도72관성64
  37. 법률·세무는 무조건 전문가에게 맡긴다긴급도76관성70
  38. 독창성은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다긴급도89관성88
  39. 인맥은 넓을수록 좋다긴급도74관성65
  40. 좋은 대학이 좋은 삶을 보장한다긴급도90관성86
  41. 리더는 답을 아는 사람이다긴급도91관성82
  42. 브랜딩은 모든 채널에서 같은 메시지다긴급도73관성63
  43. 집중하려면 알림을 다 꺼야 한다긴급도70관성60
  44. 직업이 곧 나의 정체성이다긴급도85관성83
  45. AI와의 대화는 진짜 대화가 아니다긴급도82관성74
  46. 계산은 AI가 하니 수학은 필요 없다긴급도79관성71
  47. 특허·IP가 가장 강한 해자다긴급도71관성66
  48. 위기는 매뉴얼대로 대응한다긴급도83관성77
  49. 한국어 콘텐츠는 한국 시장용이다긴급도80관성69
  50. 인간다움이 최후의 방어선이다긴급도77관성81

긴급도는 지금 버리지 않을 때 손실이 커지는 속도다. 관성은 버리기 어려운 정도다. 2026년 5월 기준으로 내가 정성적으로 매긴 숫자라서, 숫자 자체보다 어디에 몰리는지를 보는 쪽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