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장비를 사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늘 이렇게 말하게 된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나도 그랬다. Fellow Stagg EKG 하나로 몇 년을 보냈고, 드립백만 걸어도 충분히 좋았다. 하리오 V60 유리 드리퍼를 사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손으로 천천히 물을 붓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고, 원두 향이 올라오는 것도 좋았다.

BALMUDA The Brew 드리퍼에 원두를 담는 장면
드립백에서 하리오로 넘어가던 때에는, 원두를 직접 담는 일도 꽤 큰 변화처럼 느껴졌다. 출처: BALMUDA 공식 이미지.

그런데 좋은 것과 자주 하는 것은 조금 다르더라. 손으로 내리는 커피가 좋은 건 맞는데, 매번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아침에는 특히 그렇다. 물을 끓이고, 필터를 접고, 원두를 갈고, 타이머를 켜고, 물줄기를 신경 쓰는 일이 어떤 날은 좋지만 어떤 날은 그냥 귀찮다. 커피는 마시고 싶은데 커피를 만드는 과정까지 사랑할 마음은 없는 날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는 형이 BALMUDA The Brew 이야기를 했다. 자기가 산 커피 제품 중에 꽤 만족하면서 쓰고 있다고 했다. 발뮤다답게 예쁘고, 생각보다 맛도 안정적이고, 무엇보다 아침에 편하다고. 이 말이 좀 위험했다. “아침에 편하다”는 말은 커피 장비를 사기 위한 명분으로 너무 좋으니까.

BALMUDA The Brew 추출부를 가까이 보여주는 공식 이미지
처음엔 버튼을 누르는 커피가 좀 심심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침에는 이 정도의 성실함이 꽤 고맙다. 출처: BALMUDA 공식 이미지.
33만 원새 제품보다 가볍게 시도할 수 있었던 중고 가격.
버튼 하나물과 원두를 넣고 누르면 아침 커피의 긴장이 줄어든다.
자주 마시게 됨커피를 더 깊게보다, 더 자주 생활 안으로 들인 장비.

그 자리에서 당근을 열었다

사람이 뭔가를 사게 되는 순간은 대체로 길지 않다. 오래 고민한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마음이 기울어져 있고 마지막 핑계만 기다리는 경우가 많다. 그날 나에게는 그 형의 추천이 마지막 핑계였다. 듣고 있던 자리에서 바로 중고 매물을 찾아봤고,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 BALMUDA The Brew를 발견했다.

가격은 33만 원. 새 제품 가격을 생각하면 꽤 괜찮아 보였다. 물론 중고 제품이라는 불안함은 있었다. 커피 머신류는 물이 들어가는 제품이라 찝찝할 수 있고, 이전 사용자가 어떻게 관리했는지도 중요하다. 그래도 사진상 상태가 나쁘지 않았고, 판매 글도 그럭저럭 믿을 만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날 이미 마음이 갔다.

결국 그날 저녁에 바로 거래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때가 홈카페 장비가 늘어나기 시작한 첫 번째 분기점이었다. 그 전까지는 “드립백에서 조금 더 나아간 사람” 정도였는데, 이때부터는 “기계를 하나 들인 사람”이 됐다. 이 차이가 생각보다 크다. 기계를 들이면, 커피가 조금 더 생활 안쪽으로 들어온다.

선반 위에 놓인 BALMUDA The Brew 공식 라이프스타일 이미지
중고로 들여온 기계였지만, 집에 놓고 보니 물건의 분위기가 먼저 보였다. 출처: BALMUDA 공식 이미지.

버튼 하나짜리 커피

BALMUDA The Brew를 처음 써보고 제일 좋았던 건 맛보다도 리듬이었다. 물을 넣고, 원두를 넣고, 버튼을 누르면 된다. 물론 완전히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아니다. 원두를 갈아야 하고, 필터도 넣어야 하고, 다 마신 뒤에는 치워야 한다. 그래도 손으로 내릴 때의 긴장감은 없다. 물줄기가 흔들려서 망칠 일도 없고, 내가 잠깐 딴짓한다고 추출이 엉망이 되는 것도 아니다.

BALMUDA The Brew가 물을 떨어뜨리는 추출 디테일
물줄기와 시간을 내가 붙잡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생각보다 컸다. 출처: BALMUDA 공식 이미지.

처음에는 이게 살짝 반칙처럼 느껴졌다. 커피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손으로 내리는 과정은 생략하고 싶은 건가. 그런데 며칠 써보니 그런 생각은 금방 사라졌다. 취미도 매일 같은 밀도로 좋아할 수는 없다. 어떤 날은 직접 내리는 게 좋고, 어떤 날은 그냥 잘 내려진 커피를 마시고 싶다. 자동 드립 머신은 후자의 날에 꽤 좋은 답이었다.

맛도 생각보다 괜찮았다. 엄청난 스페셜티 경험이라거나, 카페의 바리스타가 내린 한 잔을 대체한다거나, 그런 말까지는 못 하겠다. 하지만 집에서 매일 마시는 커피로는 충분히 좋았다. 특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대충 내렸을 때보다 일관적이었다. 이게 중요하다. 내 실력이 애매한 상태에서는 기계가 나보다 성실하다.

내 실력이 애매한 상태에서는 기계가 나보다 성실하다.

BALMUDA The Brew로 내린 커피를 컵에 따르는 장면
잘 내렸다는 확신보다, 매번 비슷하게 마실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출처: BALMUDA 공식 이미지.

발뮤다다운 물건

발뮤다 제품은 늘 조금 묘하다. 기능만 놓고 보면 비슷하거나 더 좋은 제품이 있을 수 있다. 가격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막상 집에 두면 기분이 나쁘지 않다. 버튼을 누르는 느낌, 물이 떨어지는 모습, 제품이 차지하는 분위기 같은 게 있다. 이런 걸 두고 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런 쪽에 은근히 약하다.

The Brew도 그랬다. 주방 한쪽에 올려두면 커피 머신이라기보다 작은 오브제처럼 보인다. 너무 전문 장비처럼 위압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장난감처럼 가볍지도 않다. 아침에 불 켜고 물 넣고 버튼 누르면, 잠깐 동안 집안 분위기가 카페 쪽으로 기운다. 물론 5분 뒤에는 컵을 들고 정신없이 나가지만.

다만 발뮤다다운 물건이라는 말에는 장점과 단점이 같이 들어 있다. 예쁘고, 쓰는 기분이 좋고, 브랜드가 만든 분위기가 있다. 반대로 말하면 그 분위기에 비용을 꽤 지불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새 제품이었다면 내가 샀을지 모르겠다. 33만 원이라는 중고 가격이 아니었다면 아마 조금 더 오래 망설였을 것이다.

BALMUDA The Brew 정면 프로필 공식 이미지
새 제품 가격이었다면 조금 더 오래 망설였을 것이다. 중고 가격은 마음을 훨씬 가볍게 만들었다. 출처: BALMUDA 공식 이미지.

중고로 사서 더 좋았던 물건

중고로 사면 물건을 대하는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새 제품을 큰돈 주고 샀을 때보다 기대치가 낮고, 쓰다가 안 맞으면 다시 보내도 된다는 생각이 있다. The Brew는 그 점에서도 좋았다. “이 가격이면 써볼 만하지”라는 마음으로 들였고, 결과적으로 꽤 오래 만족했다.

물론 완벽한 물건은 아니다. 손으로 내리는 재미는 없다. 레시피를 세밀하게 바꾸고 싶은 사람에게는 답답할 수 있다. 커피를 아주 진하게 마시거나, 원두마다 추출을 다르게 맞춰보고 싶은 사람에게도 조금 아쉬울 수 있다. 그리고 결국 이것도 치워야 한다. 커피 장비는 언제나 마지막에 설거지를 남긴다.

그래도 내가 The Brew를 좋게 기억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커피를 마시게 해줬기 때문이다. 커피를 공부하게 해준 물건이라기보다, 커피를 자주 마시게 해준 물건에 가깝다. 바쁜 아침에도 한 잔을 만들 수 있게 해줬고, 손으로 내리기 귀찮은 날에도 집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게 해줬다. 그 정도면 충분히 좋은 장비였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멈췄다면 좋았겠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The Brew로 만족하면서 쓰고 있었으면 됐는데, 커피 관련 영상을 더 보고, 원두를 더 사고, 추출 이야기를 더 듣다 보니 눈이 또 옆으로 갔다. 에스프레소 머신도 궁금해지고, 그라인더도 중요하다는 말을 듣게 되고, 그러다 결국 홈카페 장비가 갑자기 늘어난 기록처럼 장비가 갑자기 늘어났다.

그래도 처음 기계로서 The Brew가 준 감각은 꽤 선명하게 남아 있다. 버튼 하나로 커피가 내려오는 편함. 내가 직접 잘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괜찮은 결과가 나오는 안정감. 그리고 중고로 잘 샀다는 작은 만족감. 이런 건 시간이 지나도 기록해둘 만하다.

커피 장비를 추천하냐고 묻는다면 아직도 조금 조심스럽다. 사람마다 마시는 방식이 다르고, 귀찮음을 견디는 정도도 다르니까. 하지만 나에게 BALMUDA The Brew는 “집에서 커피를 더 자주 마시게 만든 물건”이었다. 커피를 더 깊게 만든 장비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해야겠지만, 커피를 생활에 붙여준 장비는 이쪽에 가까웠다.

그래서 33만 원에 사온 그날의 선택은 아직까지는 꽤 괜찮은 선택으로 남아 있다. 물론 그 뒤에 따라온 지출까지 생각하면 이야기가 조금 복잡해지지만. 커피 장비는 늘 그렇다. 하나를 사면 끝날 것 같지만, 이상하게 그 하나가 다음 하나의 문을 열어둔다.

이런 장비 구매 판단은 나중에 맥북프로를 샀을 때도 비슷하게 반복됐다. 그때도 필요와 충동은 생각보다 깔끔하게 갈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