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좋아하세요? 저는 참 좋아하는데요!
한국에서 커피 싫어한다는 사람을 찾기는 생각보다 어렵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 잔, 출근해서 한 잔, 점심 먹고 한 잔. 누군가는 잠을 깨려고 마시고, 누군가는 습관처럼 마시고, 누군가는 그냥 손에 뭐라도 들고 있어야 마음이 놓여서 마신다. 나도 대체로 그쪽이었다. 많이 마실 때는 하루 4-5잔도 마시니.
그렇다고 처음부터 커피 장비에 관심이 많았던 건 아니다. 오랫동안 나에게 커피는 그렇게까지 복잡한 일이 아니었다. 보통은 카페에서 사서 마시고, 가끔 집에서 즐길 때는 물 끓이고, 드립백 걸고, 천천히 붓고, 마시면 끝. 그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전기주전자 하나면 됐다. 온도 조절이 1도 단위로 된다는 점 하나에 매료되어 산, Fellow Stagg EKG 600ml 매트 블랙 하나면 꽤 충분했다.

이 전기주전자는 지금 생각해도 출발점으로 꽤 좋은 선택이었다. 물 온도 맞추고, 천천히 따르고, 드립백에 물을 붓는 것만으로도 뭔가 조금 더 정성 들인 커피를 마시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예쁘잖아. 사실 그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장비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도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하리오 드립 스탠드 세트 WDS-1006-WN을 샀다. 드립백에서 한 발짝 더 들어간 셈이다. 종이 필터를 접고, 원두를 갈고, 뜸을 들이고, 물줄기를 신경 쓰는 단계. 말은 거창하지만 그냥 유튜브에서 본 걸 조금씩 따라 해본 정도였다. 처음부터 맛을 정확히 구분했다기보다는, 이런 걸 하면 왠지 더 맛있어지는 것 같고, 뭔가 내 손으로 커피를 만든다는 느낌이 좋았다. 집안 가득 퍼지는 커피향도.

유튜브도 한몫했다. 커피를 다루는 채널에서 카페 투어, 스페셜티 커피 이야기, 원두 추천, 추출 레시피 같은 걸 하나둘 보게 됐다. 처음에는 그냥 배경처럼 틀어놓고 봤는데, 보다 보면 이상하게 궁금해진다. 산미가 뭔지, 단맛이 뭔지, 클린컵이 뭔지. 사실 아직도 그 말을 다 정확히 안다고는 못 하겠다. 그래도 어느 순간부터 편의점 커피를 아무 생각 없이 마시던 때와는 다른 관심이 생겼다.
이렇게까지 될 거라고는 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 우우우 예예.
BALMUDA The Brew를 중고로 사왔다
그러다 아는 형이 BALMUDA The Brew 이야기를 했다. “커피 제품 산 것 중에 가장 만족하면서 쓰고 있어.” 좀 비싸긴 해도, 예쁘기도 하고, 맛도 꽤 안정적이라고. 무엇보다 아침에 편하게 쓸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나도 예전부터 발뮤다 제품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뭔가 기능보다 분위기를 먼저 팔 것 같은 브랜드이긴 한데, 그래도 그 분위기가 싫지 않은 쪽이다.
그 얘기를 듣고 있던 그 자리에서 바로 당근에 들어가서 올라와 있는 매물 중 가장 괜찮아 보이는 걸로 구입했다. 33만 원에 그날 저녁에 바로 거래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때가 장비가 늘어나기 시작한 첫 번째 분기점이었다.
그 첫 분기점은 나중에 따로 발뮤다 더 브루를 33만 원에 사온 날로 남겨두었다. 커피 맛보다 먼저, 생활 안에 기계가 들어오는 감각이 꽤 컸기 때문이다.

BALMUDA The Brew는 만족도가 꽤 높았다. 내가 손으로 내리는 것보다 일관적이고, 생각보다 맛도 좋았다. 아침에 원두 넣고 물 넣고 버튼 누르면 되는 게 편했다. 손으로 내리는 커피가 주는 재미도 있지만, 귀찮은 날에는 기계가 잘해주는 게 최고다. 사실 귀찮을 때가 더 많다.
그렇게 커피의 세계에 점점 발을 들이고 있었다. 취미라고 부르기에는 살짝 이르고, 장비병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억울한 단계.
그런데 여기서 멈췄으면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Rancilio Silvia Pro X, 이런 가격은 처음입니다
원래 이걸 사려던 건 아니었다. 유튜브로 커피 채널을 더 많이 보게 되고, 그러다 눈만 높아져서는 La Marzocco 같은 장비들을 보고 있던 어느 날, Rancilio Silvia Pro X가 엄청 싸게 풀렸다는 걸 알게 됐다. 보통 2,500,000원 정도에 형성돼 있던 가격이, 1,425,000원. 무려 43% 할인이다. 이런 가격 앞에서는 Rancilio Silvia Pro X를 전혀 모르고 있었더라도 마음이 약해진다. 특히 이미 커피에 조금씩 관심이 생긴 상태라면 더 그렇다.
에스프레소 머신은 드립머신과는 다른 세계다. 우유 스팀도 할 수 있고, 포터필터, 템핑 같은 액세서리부터, 분쇄도도 훨씬 민감하고, 추출 시간도 봐야 한다. 여기서부터 이제 진짜 커피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냥 커피를 내려 마시는 게 아니라 갑자기 작은 카페를 집에 들이는 느낌이다.
그런데 또 생각은 이렇게 흐른다. 어차피 커피를 자주 마시잖아. 밖에서 사 마시는 돈을 생각하면 장기적으로 괜찮지 않을까. AI에게 이 소비가 얼마나 합리적일 수 있는지를 계속 묻는다. 집에서 더 맛있게 마시면 좋잖아.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해보면 좋잖아. 이런 말들이 순서대로 나온다. 사람은 사고 싶으면 이유를 정말 잘 만든다. AI가 또 그걸 잘 도와준다.

그래서 결국 샀다. Silvia Pro X를 들이고 나니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알게 됐다. 커피가 갑자기 일이 되었다. 좋게 보면 그만큼 취미생활을 넘어 꽤 맛있는 커피를 집에서도 마실 수 있게 되었고, 귀찮은 뜻으로도 그렇다. 원두를 보관하는 것에서부터 갈고, 도징하고, 탬핑하고, 추출하고, 스팀하고, 닦고, 버리고, 다시 닦는다. 커피 한 잔이 나오기까지 손이 꽤 많이 간다.
그래도 맛은 정말 좋다. 이게 문제다. 귀찮으면 그만두면 되는데, 맛이 좋으면 또 하게 된다. 카페보다 맛있다고 느껴지는 날이 점점 생긴다. 물론 늘 그런 건 아니다. 분쇄도 이상하게 잡히고, 원두 상태 애매하고, 우유 스팀 망하면 바로 현실로 돌아온다. 처음에는 마시는 커피보다 버리는 커피가 훨씬 많았다. 그래도 잘 나온 날의 한 잔은 꽤 강력하다.
머신을 샀더니 그라인더가 두 대가 됐다
커피의 세계에 들어오면 이게 문제다. 뭔가 에스프레소 머신만 사고 나면 끝일 줄 알았는데, 끝이 아니었다. 사실 머신보다 중요한 게 그라인더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나도 그랬다. 살거면 그라인더에 투자하라고. 분쇄가 조금만 달라도 맛이 확 달라진다. 같은 원두인데도 어느 날은 쓰고, 어느 날은 밍밍하고, 어느 날은 갑자기 괜찮다.
Silvia Pro X가 싸게 풀렸다는 걸 알게 된 것도 사실, Silvia Pro X와 Mahlkonig X54 세트가 190만 원대에 나온 걸 보면서 알게 됐다. X54도 꽤 만족스러웠지만, 그때쯤 새로 출시된 X64SD까지 눈에 들어왔다. 왜 두 대냐고 물으면 나도 조금 머쓱하다. 내 지름은 잠시 본분을 망각하고, 괜찮아 보이는 것들이 있으면 집에 들여오기 시작했다. 각각 용도가 다르다는 말을 할 수는 있다. 하나는 좀 더 일반적인 홈 그라인더 느낌으로 커피를 여러잔 내릴 때 쓰기 좋은 편이고, 하나는 싱글 도징 쪽으로 쓰기 좋고. 그런데 결국 커피 장비가 늘어나는 논리는 대체로 이렇다. “용도가 다르다.”


이쯤부터는 커피를 마시는 건지 장비를 만지는 건지 조금 헷갈리기 시작했다. 원두 봉투를 열고, 분쇄도를 바꾸고, 몇 초 나왔는지 보고, 맛이 어떻다고 혼자 생각한다. 전에는 그냥 마셨던 걸 이제는 계속 평가하게 된다. 좋은 변화인지 피곤한 변화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무엇보다 내가 맛을 잘 느끼고 있는지 헷갈리는 시점이 온다. 그것도 꽤 빠른 시간에.
여기에 Pesado 바텀리스 포터필터, Pesado X AD커피 셀프 레벨링 스프링 탬퍼 같은 것들도 샀다. 바텀리스 포터필터를 쓰면 추출이 잘못됐을 때 바로 알 수 있다. 커피가 사방으로 튀면 마음도 같이 튄다. 반대로 예쁘게 내려오면 괜히 뿌듯하다. 사실 이건 맛보다도 보는 재미가 있다.
Fellow Aiden은 어쩌다
여기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또 끝나지 않았다. Fellow Aiden이 있다. 처음에는 60만 원대에 보던 제품이었다. 예쁘고 궁금하긴 했지만, 이미 BALMUDA The Brew도 있고, Silvia Pro X도 있고, 그라인더도 있으니 굳이 살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29cm에서 40만 원대로 내려왔다. 이게 참 어렵다. 60만 원대에 팔리던 Fellow Aiden이 40만 원대가 되면 안 살 수 있어요?
사실 안 살 수 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안 사면 된다. 이미 커피를 내릴 방법이 세 가지나 있는데, 또 자동 커피 메이커를 살 이유는 많지 않다.

Fellow Aiden은 아직 따로 길게 써야 할 것 같다. 제품 자체도 궁금한 점이 많고, BALMUDA The Brew와 비교할 거리도 꽤 있다. 자동 드립머신이라는 큰 틀은 비슷하지만, 쓰는 감각은 다르니까. BALMUDA The Brew는 집에서 쓰기 적당한 것 같고, Fellow Aiden은 사무실에서 쓰기에 더 좋을 것 같다. 이건 나중에 따로 정리해두려고 한다. 정말로.
커피는 카페보다 맛있고, 치우는 건 여전히 귀찮다
이렇게 장비가 늘어나다보니 처음 한달 정도는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다. 새 장비를 사면 테스트를 해야 한다. 원두도 바꿔보고, 분쇄도도 바꿔보고, 우유도 데워보고, 아이스도 해보고, 자동 드립도 해본다. 그러다 보면 하루에 커피가 너무 많아진다. 몸이 먼저 안다. 잠이 안오거나, 눈꺼풀이 떨리거나. 그래서 한동안 조금 줄였다.
요즘은 다시 하루 한 잔 정도로 돌아왔다. 이 정도가 좋다. 너무 의식하지 않고, 그래도 대충 마시지는 않는 정도. 손에도 조금 익었다. 어떤 날은 그냥 자동 머신에 맡기고, 어떤 날은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어떤 날은 귀찮아서 아무것도 안 한다. 커피 장비가 많아졌다고 해서 매일 성실해지는 건 아니다. 그래도 밖에서 사 먹기보다는 직접 내려서 텀블러에 담아 출근하는 날이 많아졌다.
집에서 내린 커피가 카페보다 맛있게 느껴질 때도 많다. 내가 좋아하는 원두를 쓰고, 내 입맛에 맞게 맞추고, 양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치우는 건 여전히 귀찮다. 이건 장비가 아무리 좋아져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커피가루는 생기고, 물은 흘리고, 스팀완드는 닦아야 하고, 포터필터는 씻어야 한다.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정말 많이 간략해 졌다.
그래서 홈카페라는 말은 반은 낭만이고 반은 설거지다. 사진으로 보면 예쁘고, 한 잔이 잘 나오면 기분도 좋다. 하지만 그 뒤에는 항상 젖은 행주와 커피 찌꺼기와 가득 쌓인 설거지거리가 있다.
홈카페는 반은 낭만이고 반은 설거지다. 그래도 내일 아침의 한 잔이 기대된다.
그래도 다시 돌아가도 몇 가지는 또 샀을 것 같다. Fellow Stagg EKG는 여전히 좋고, BALMUDA The Brew는 중고로 산 가격을 생각하면 꽤 만족스럽고, Silvia Pro X는 손이 많이 가지만 재미가 있다. Mahlkonig 그라인더들은 나름 역할을 나누어 맛있는 커피를 만들어 주고 있고.
이 글은 장비 리뷰라기보다는 그동안 모은 것들을 한 번 펼쳐놓은 첫 기록에 가깝다. 나중에 하나씩 따로 써볼 생각이다. BALMUDA The Brew가 왜 만족스러운지, 우리 나라에서는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Silvia Pro X는 또 어떤지, X54와 X64SD는 어떻게 쓰고 있는지, Fellow Aiden은 어떤 점이 좋은지.
장비를 사는 판단은 늘 애매한데, 맥북프로를 산 다음 날 가격이 올랐던 일도 비슷한 결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필요와 충동 사이에서 나중에야 이유가 붙는 순간들이 있다.
이 블로그를 다시 열면서 쓴 첫 글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나중의 내가 다시 꺼내볼 수 있는 기록이 없어서 아쉬웠다고. 커피 장비도 마찬가지다. 샀고, 썼고, 맛있고, 귀찮았고, 그래도 좋았다.
커피는 카페보다 맛있고, 치우는 건 여전히 귀찮다. 그래도 내일 아침에 마실 커피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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